나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모습이 어떤 프레임 안에 영원히 박제되는 것이 싫다.
마음에 들지 않는 찰나의 내 모습이 누군가의 시선 아래 두고두고 머무는 상황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의 기록을 정리하려고 하면서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남겨둔 기록이 없으니 머릿속의 풍경들도 그때의 기분이나 감각들도 맥락 없이 휘발되어 버렸다.
이곳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여행이 불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분명 그곳에 존재했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충분히 만끽했다.
단지 그 기억을 다시 끄집어낼 만한 구체적인 실마리가 남아있지 않을 뿐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뒤늦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이제는 어쩌다 남겨진 약간의 사진과 여전히 부족한 문장으로나마 그날의 공기와 온도를 붙잡아두려 한다.
그저 흩어지기 쉬운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주워 모으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들이다.

제목2023년 7월 기타큐슈(고쿠라-모지코)2026-03-19 00:39
작성자 Level 10

5.png
 4.png


90년대의 일본은 내게 일종의 막연한 동경이었다. 당시의 일본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분명 대단한 구석이 있었고, 어린 마음에도 그 문화적 영향은 꽤 강렬하게 남았다. 아마도 그 영향이었을 것이다. 성인이 된 후, 나는 여행으로든 출장으로든 가장 자주 발걸음을 옮기는 곳으로 일본을 택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꽤 오래전부터 일본에 가고 싶다던 누나의 말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어머니와 매형까지 포함한 4인 가족 여행을 직접 계획했다.


인천을 떠나 도착한 기타큐슈 공항은 아직 한국 여행객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소도시 특유의 한적함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고쿠라역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고쿠라성으로 향했을 때 마주한 일본의 한여름은,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뜨거웠다. 단순히 기온만 높은 것이 아니라, 마치 달궈진 거대한 솜이불이 온몸을 빈틈없이 짓누르는 듯한 습한 열기였다. 가만히 서 있어도 뒷목을 타고 흐르는 땀줄기가 피부에 닿는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자극했고, 고쿠라성의 해자 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지독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첫째, 둘째날은 고쿠라성부터 헤이와거리, 탄가시장, 그리고 차차타운까지 고쿠라 시내를 중심으로 시간을 보냈다. 고쿠라성은 현대적인 빌딩 숲 사이에서 기묘한 정적을 유지하며 서 있었고, 그 주변을 감싼 해자는 무거운 열기를 머금은 채 느릿하게 물결쳤다. 성을 빠져나와 거리를 걷다 보니 소도시 특유의 정갈한 풍경이 이어졌고, 탄가시장의 좁은 통로에 들어서자 오래된 시장 특유의 냄새와 사람들의 활기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세월의 흔적이 밴 천장의 낮은 아케이드 아래를 걷는 기분은 마치 과거의 어느 시간대를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들른 차차타운의 대관람차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는데, 그 단조로운 움직임이 한여름의 고단한 열기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저녁 무렵 누나와 골목 안쪽을 배회하다 우연히 ‘백두산’이라는 술집을 발견했다. 오래된 노포 특유의 공기가 흐르는 그곳은 음식의 맛도 접객의 수준도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흡연가로서 실내 흡연이 허용되는 일본 술집 특유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한결 편안하게 만들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나는 비로소 일본에 와 있다는 실감을 했다. 그렇게 첫날의 밤은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셋째 날은 고쿠라역에서 열차를 타고 모지코로 향했다. 원래 계획은 바다 건너 시모노세키의 가라토시장까지 넘어가 신선한 초밥을 맛보고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정오를 넘기며 쏟아지는 열기에 일행 모두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무리한 일정보다는 눈앞의 풍경에 집중하기로 하고 시모노세키는 다음을 기약하며 포기했다. 모지코역은 승강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시간을 되돌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풍스러운 목조건물이 뿜어내는 특유의 질감과 은은한 나무 향이 일본 소도시 특유의 정갈한 감성을 완성하고 있었다. 역내에 자리 잡은 스타벅스 역시 현대적인 세련됨 대신 역사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컨셉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어, 그 공간을 가만히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항구를 따라 조성된 모지코 레트로 거리를 걸으며 오래된 건물들을 구경했고, 익살스러운 바나나맨 동상 앞에서 가벼운 기념사진을 남겼다. 번화한 관광지를 살짝 벗어나 외곽으로 발길을 옮기자, 마침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축제를 열고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겨운 축제의 소음 속에서, 푸드트럭의 갓 구운 음식과 차가운 맥주를 사 들고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맥주의 차가운 감각이 그날의 지독한 더위를 잠시나마 씻어주었다. 고쿠라로 돌아온 저녁에는 매형까지 불러 셋이서 다시 ‘백두산’의 문을 열었다. 우리가 찾은 이 근사한 장소를 매형에게도 꼭 공유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셋이서 잔을 기울이며 여행의 이런저런 감상을 나누는 사이, 기타큐슈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적당히 들뜨고 적당히 차분하게 저물어갔다.


마지막 날 아침은 여행의 끝을 알리는 특유의 차분한 공기로 시작되었다. 특별한 일정 없이 곧장 공항으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이른 시간부터 서두른 덕분에 마음에는 묘한 여유가 생겼다. 다시 돌아온 기타큐슈 공항은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더 아담하고 정답게 느껴졌다. 체크인을 마치고 작은 로비에 앉아 있으니, 소박한 공항 건물이 내뿜는 정적과 차분함이 여행 내내 달구어졌던 몸과 마음을 천천히 식혀주는 것 같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소도시 특유의 한적함으로 가득했다. 화려한 성취감보다는 적당한 피로와 만족감이 교차하는, 마치 잘 읽은 단편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듯한 기분으로 기타큐슈를 떠날 채비를 마쳤다.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과 우연히 마주친 풍경들이 적당한 두께로 겹쳐진, 그런 여름날의 기록이었다.